물잎새
세 번째 만남, 바로 그 전까지의 본문
눈이 오셨나, 비가 내리었나. 풀잎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앉으며 손으로 내리눌렀더니 웃음과도 같은 물기가 묻어났다. 어느새 들마를 한참 넘긴 때다. 깊은 산이 마지막 해넘이를 받아내어, 온종일 나돌았던 태양의 온기라도 손 한 줌에 차지 못해 사라지는 때. 아주 가까운 예로 이 이슬을 닮은 물방울들, 살바람만큼이나 차다. 땅거미가 그것을 가려간 지 오래인지라 어둡고 찬 것이다. 하여 손에 와 닿는 빛이 적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더니 주변은 이미 온통 밤이었다. 해님이란 뚝 하고 떨어졌고 일렁이는 검푸른 빛만이 주변에 가득.
어슬녘 바다와도 같은 언덕, 그곳에서 이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어떻게 그곳에 있었느냐, 그곳은 어디냐 물으면 기억이 뿌옇게 흐려져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느냐 물으면, 금방이라도 눈앞에 있는 듯 떠올라 아이는 반가운 기색을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외관을 말하자면 크게 휘어진 뿔이 달빛을 둥글게 담아 안쪽으로 갈수록 밝은 빛을 띠고, 턱 보기에도 복스러워 보이는 고동빛 머리카락이 작은 얼굴을 감싸듯 자리 잡았다. 말간 얼굴만큼이나 부드러운 눈은 따듯한 밤을 닮았고 그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가는 일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밝은 사람. 이재는 제 앞의 낭자가 그 모습 그대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만 만남의 아주 처음 동안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면, 저보다 눈높이가 조금 올라간 낭자 앞 그 편한 복색에 귀의도 안에서만 자란 유생이 달리 시선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마저도 그녀다웠기에, 또 그보다는 진심을 말하는 맑은 목소리에 사람은 이야기에 금방 빠져들게 되었더라.
이재는 실바람에 풀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도 달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날의 달을 떠올리면 늘 미쁨이 든다. 그러니 분명, 여느 때처럼 산보를 나왔는데 귀한 분을 뵙게 되어 기쁘다 말했을 것이다. 그러자 산을 닮아 부드러운 사람이 말하였다. 달을 닮았노라고.
생각해보면 국적도, 지위도 모르거니와 생전 만나볼 일 없는 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상일국의 유생으로 자라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을 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차림새와 모습은 제 나라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연선이란 꼭 제 손윗누이 같은 친근함이었고 후일의 시간을 엿본 듯 아주 오래 봐온 정겨움이었다. 어찌 그러했는가? 이재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 또한 모를 일이다. 모두에게 다정히 대하는 그분의 천성 탓일는지.
그 날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시작이 흐리듯 끝 또한 흐려 이야기가 어찌 맺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산을 닮은 낭자가 저에게 달을 닮았다 하였다, 그저 그뿐. 다만 이재는 하나의 연이 반딧불의 모양으로 자리 잡힌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정말로 그뿐이었다.
허나 누가 말했던가, 삶이란 붓길을 닮았다고. 길이 정해져 있는 듯 싶으면서도 휙 꺾이고 홱 꺾였다가 도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재는 연선을 만나게 되었다. 풀을 먹는다 하시어 무언가를 물어봤는데, 돌아온 대답이 비밀이라기에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때문에 대화의 맥락이 어찌 되었었는지는 흐릿하나, 저가 연선에게 한 가지 농을 쳤던 것만은 선명하다. 찬 곳에서 잠이 들면 입이 돌아가는데, 그리되면 아주 밉다 하였다. 밉게 되면 어찌 하느냐는 물음에 제 볼을 잡아당기고 늘려보며 이리하면 입이 돌아갔을 때 미울지 고울지 대강 알 수 있다 하였다. 제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여주고 고대로 따라해 주는 연선이 무척이나 곱고 또 고마워, 차마 앞에서 웃지 못하고 꽃에게 물어보라 하였는데…
그렇지, 연선은 그 꽃을 똑 꺾어 어느 새엔가 우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에 그만 웃음을 잊어버렸는데, 가만 돌아보니 이는 낭자께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아닌가. 약과를 눈앞에 두고 고소한 내가 나면 네게 인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다른 생각이다. 다음번에는 다름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겠다고, 이재는 그리 생각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이재에게 비친 연선은 마음자리가 곧고 냅뜰성 있는, 밝은 낭자였다. 명유국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어도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쳐 가까워진 자가 장군일 것이라 곧바로 생각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때문에 이재는 아무런 무거움 없이 연선에게 털어놓았다. 은인께 먹을 하나 드리고자 하였는데 그것에 호랑이가 필요하다는.
…하여 한 시진 정도 지난 즈음, 이재는 이리까지는 될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호랑이에게 사과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연선에게 기가 죽어 애처로워진 눈에 못 이겨 도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던가. 연선이 호랑이 옷을 갖고 싶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사리사욕을 위해 생명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 대답하였더니 연선은 놀라 고개를 저었다. 추운 산에선 이리 업어 호랑이의 온기를 빌릴 수 있다는 뜻이었음을 해명했다.
“목숨을 잃은 아이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문득 그때 이재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늦게서야 머릿속에 박히는 ‘호랑이를 데려오라’는 전언이 머리를 쿵 하고 내려친 까닭이었다. 자신은 사욕을 위해 한 생명을 희생시키려는 것인가? 사욕이 아닌 은인을 위한 것이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것을 핑계 삼아 무언가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것으로 선물을 마련한다 해도, 그분이 이것에 기뻐하실 것인가? 나는……. 점차 흐려져 가는 생각에 이재는 스스로를 훌닦았다. 정신 차려라.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이곳에 걸음 했나. 겨우, 먼저 걷던 연선이 이상히 생각하고 돌아보기 전에 떨떠름한 걸음을 해껏 이었다.
은을 위하여 호랑이를 잡으러 왔다. 그러나 물건으로 은을 갚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사욕이자 아둔함이었고, 더군다나 그를 위해 하나를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고마움을 위해 미안함을 져야 한다는 것은 어느 아무개가 지어낸 생청인가. 이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호랑이를 돌려보내며 깊어간 밤, 둘은 다음에 또 보자며 약조했다. 두 번째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
시원스레 날이 밝았다. 들새가 쉬어가는 가지에서 햇빛이 오르르 떨어지며 이재는 꿈에서 깨어났다. 앙상한 겨울가지여도 받칠 것은 바친다. 한껏 몸을 늘리던 아이가 작게 웃으며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덕분에 동기 하나를 깨우고 같이 일어난다. 꼭두새벽부터 깨우고 그러오. 밉지 않은 타박에 이재는 다시 한 번 웃고는 옷을 걸쳤다.
“산보 가려구? 벌써 난벌을 다 입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하품하며 묻는다. 문지방을 넘어가던 발이 그 말에 멈추었다. 그저 흘려 말하기엔 너무나도 귀한 분, 그 뜻을 담아 이재는 온전히 뒤돌아 대답했다.
“예, 소중한 벗을 뵈러 갑니다.”
흠. 동기는 이재의 행색을 한눈에 훑어보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아주 당당한 곳은 아닌가 보오. 그러나 이재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사내는 그 큰 손만을 휘휘 저으며,
“수업 전엔 돌아오소.”
하고 만다. 잠시 그 모양을 바라보던 이재가 햇내기같은 웃음을 지었다. 공자께서도 수업 전에는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여 여차여차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몰라보게 맑다. 이재는 막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 바람이 부는가, 구름도 천천히 길을 간다. 그와 함께 연선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이재는 작게 미소 지었다. 달. 낭자께서 저를 달이라 하셨으니, 나는 구름이 흘러가듯 찾아뵈면 되는 것일까. 산과 꼭 빼닮은 그분을. 정작 본인은 모르겠다 말씀하시지만 그러한 마음에서부터 고운 풀내가 나는 것을, 그러나 이재는 더한 설명 없이 미소만 짓곤 했다. 늘 정겹게 사람을 품어주는 사람, 산의 태동을 닮은 기운 아래에 자리잡힌 따듯하고 부드러운 흙. 작은 사람의 말이라도 마음으로 들어주나 어딘가 묵직하여 신념이 확고한… 그 모습은 해거름을 치를 때의 산과도 같으셨다. 이재는 두 번째의 밤을 떠올리며 하늘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 앞에 놓인 흙길은 또다시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낭자께서는 아마 언제나 그 날들의 밤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자신은 언젠가 변하여 먼저 떠나겠지만, 서로에게 보여준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 믿기에 아쉽지 않다. 애통하지 않다.
가벼운 걸음을 내디뎠다. 흥겨운 바람이 그 발치를 감는다. 저희의 관계를 물으십니까? 이재는 작게 웃으며 바람을 바라보았다.
달과 산이랍니다. 달이 보고 싶은 자는 새벽이 될 적마다 산 너머로 달을 잃고, 산이 보고 싶은 자는 달이 뜰 적마다 산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달의 찬 기운이 스산하게 다가와 밤산을 이기지 못할 터이니.
허나 달과 산이랍니다. 는개가 끼고 삿갓구름이 얹히며 위턱구름이 달무리를 지어도 늘 커다랗게 품어주는 산입니다. 낮의 태동이 검기울며 땅거미가 기어오르고 골안개가 끼어도 한 가지 밝음으로 산소리를 들어주는 달입니다.
얼핏 보시기에 데시근하십니까? 분명 저희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맞았다 할지라도 하나는 명유국의 장군이요, 하나는 상일국의 유생이니. 하여도 그렇기에 둘만이 서 있는 곳일수록 따듯함이 늘어갑니다. 그것이 고작 버려져 흉히 변한 묵밭이라 할지라도 저는 흥이 가득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여 엄두를 내어 발을 뗍니다. 마악 어둠을 보낸 지샌달, 이리 부족하고 희끗한 달일지라도 큰 산을 만나러 갑니다.
소중한 벗이요 산을 만나러 달 하나가.
(+)